“흥원(興園)을 아십니까?” ‘흥원(興園)’만 생각하면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 흥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묘(墓)다. ‘왕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 부른다. 대원군을 생각하면 곧장 떠오르는 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 흥선대원군은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경기도 남양주에는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興園)이 있다. 흥원은 흥선대원군의 자손이 경기도에 기증하고 경기도가 묘소를 다듬은 후 일반에 공개한 곳이다. 흥선대원군묘는 경기도 문화재다. 경기인저널은 2024년 첫 역사탐방으로 흥선대원군묘인 흥원을 찾았다. [편집자 주]

[사진설명] 흥원 (출처-경기도청)
[사진설명] 흥원 (출처-경기도청)

근대 조선 왕실의 희귀한 능묘, 흥원(興園)

문화재청 설명에 따르면 흥원 묘역은 조선시대 능원제도(陵園制度)를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대원군에 맞춰 간략하게 조성했다. 상하 2단으로 나뉘어져 있고 상단에는 호석으로 둘러싸인 단분(單墳)인 봉분과 그 둘레에 석호(石虎), 석양(石羊) 각 1쌍이 있다. 그 바깥에 곡담과 사성이 둘러싸여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이 있다. 하단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좌우에 각 1쌍이 있고, 묘 앞 중앙에는 방형의 장명등이 두었다.

묘역은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과 합장한 단분(單墳, 하나의 봉분) 형태다. 묘역의 석물들은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 재질이 우수하며 조각기법은 수려하고 섬세해 뛰어난 예술성을 보인다. 이는 왕실에서 제작하였기 때문인데, 근대 조선 왕실의 희귀한 능묘 석물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분 주변에는 원(園)이라는 무덤의 격식에 맞추어 석양을 바깥쪽을 향하여 배치했는데, 1907년 이후에 위치를 변경한 것이다. 묘역 하단에는 장대한 장명등, 망주석과 문석인을 차례로 배치했다. 장명등은 모란꽃 장식이 돋보이고, 망주석의 세호(細虎, 망주석 몸돌 부분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문양 장식)는 포도송이 같은 열매를 입에 물고 있는 형상이 특이하다.

문석인은 규모가 장대하고 안면 표현이 섬세해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성을 잘 담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와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 표석(1905년)을 세웠다. 신도비는 1908년에 제작한 것으로 옥개귀부형(屋蓋龜趺形, 지붕모양의 머릿돌과 거북이 받침돌의 비석 형태)인데, 이는 추존왕의 격식에 맞춘 것이다. 신도비는 오석의 흑색 몸돌과 백색의 거북이 받침돌이 대조를 이루도록 했다.

흥원은 조선 왕실 무덤의 마지막 계보를 잇고 있다. 이 점은 근대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석물과 석물 건축 양식을 갖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흥선대원군 5대손, 경기도에 기부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5대손 이청 (출처-경기도청)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5대손 이청 (출처-경기도청)

흥원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묘역이다.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을 받았다. 흥원은 흥선대원군 사망 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조성했다. 이후 1908년 경기도 파주군 대덕리에, 1966년 현재 장소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로 이장했다.

흥선대원군 5대 장손인 이청‧김채영 부부는 2017년 전주이씨 종중에서 관리하던 대원군 묘역과 주변 토지를 경기도에 기증했다. 이청 씨는 2017년 12월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묘역 2,555㎡(772.89평)와 진입로 등 주변부지 12만7,380㎡(3만8,532.45평)을 합친 전체 12만9,935㎡(3만9,305.34평)를 경기도에 기부하고 소유권 이전 등기 절차를 마쳤다. 공시지가로 약 52억 원에 이르는 규모다.

2018년 1월 4일,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흥선대원군묘역과 주변 토지를 기부한 흥선대원군 후손을 경기도청으로 초청, 감사패를 전달했다. 감사패는 병석에 있는 이청 씨를 대신해 부인이 받았다. 당시 경기도는 흥원을 역사유적공원, 힐링생태숲 등 도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사진설명] 흥원 개소 기념 둘레길 걷기 행사 002 (출처-경기도청)
[사진설명] 흥원 개소 기념 둘레길 걷기 행사 002 (출처-경기도청)

이에 따라 경기도는 2021년부터 화장실과 주차장, 둘레길 조성 등의 정비를 진행했다. 둘레길은 바람길, 사색길, 석파길, 소리길 등 총 네 개의 코스로 구성했다. 경기도는 2023년 10월 10일, 역사문화공원 조성을 마치고 도민에게 개방했다. 흥원 개방일인 10일에는 남양주시, 경기문화재단 관계자 및 화도읍 지역주민 등 40여 명과 함께 둘레길 걷기 행사를 진행했다. 향후 흥원 인근 학술조사, 편의시설 보완 등을 추진해 도민들이 쉽게 흥원을 이용하고, 흥원에 대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청 씨는 경기도에 기부 의사를 전달하면서 “혼란스럽던 구한말 격랑의 시기를 강인한 정신과 굳은 기개로 살다간 흥선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정신이 새롭게 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부를 결정하게 됐다. 묘역이 당시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청 씨는 또 흥원 기부 외에 2007년 운현궁에 있는 유물 8,000여 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2018년 4월에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남연군 묘역 토지도 예산군에 기부한 바 있다.

[사진설명] 남양주 관광안내지도 (출처-남양주시)
[사진설명] 남양주 관광안내지도 (출처-남양주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누구인가

                 [사진설명] 금관조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1869년, 보물 제1499-2호) (출처-문화재청)
                 [사진설명] 금관조복을 입은 흥선대원군 ​​​​​​​(1869년, 보물 제1499-2호) (출처-문화재청)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년, 순조 20~1898년, 고종 35)은 고종의 아버지며,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다. 흥선대원군은 또 추존왕(죽은 후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흥선대원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적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에 있는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1820년 영조의 현손 남연군구(南延君球)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다.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역임했다. 1841년 흥선정(興宣正)이 됐고, 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이 됐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이 출계(出系)해 익종(효명세자)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왕위(고종)에 올랐고, 다음날 흥선대원군이 됐다.

고종은 왕으로 즉위했지만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 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했다. 왕조시대는 대체로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인 아들이 없으면 왕가에서 한 사람을 뽑아 왕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경우 선조, 철종, 고종이 이 같은 사례다. 왕의 아버지는 ‘대원군’이라 불렀다. 선조와 철종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고종은 아버지인 이하응이 생존했던 까닭에 조선 역사상 왕과 대원군이 함께 통치하는 특이한 사례를 남겼다.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Joseon-Portrait_of_Heungseon_Daewongun-06 이한철 & 유숙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Joseon-Portrait_of_Heungseon_Daewongun-06 이한철 & 유숙

흥선대원군은 역사적 평가에 있어 긍정적 비판과 부정적 비판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고종이 어렸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고, 이 기간은 대략 10년으로 잡는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았을 때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흥선대원군은 무엇보다 세도가문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기강과 왕실 권위를 세워야 했다. 또한 백성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세금제도를 개혁하고, 나라 살림도 튼실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오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와 위협도 해결할 과제였다. 당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Korean_hanbok-Hakchangui-Waryonggwan 이한철 & 유숙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Korean_hanbok-Hakchangui-Waryonggwan 이한철 & 유숙

흥선대원군과 개혁정책

이하응은 왕이 된 아들 때문에 권력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익종의 부인인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형태로 권력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대비는 권력을 잡은 지 약 2년이 지난 후인 1866년 2월에 수렴청정을 거뒀고, 고종은 이때부터 직접 통치를 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 때까지 생존했던 문인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이자 비사인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흥선대원군 집권기는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이다.

여하튼 이하응은 집권하는 동안 ‘개혁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굵직한 것만 살펴보면, △인재등용(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능력 있는 관리를 고루 선발, 남인·북인 중용) △서원 철폐(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하고 당쟁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에 서원을 40여 곳만 남기고 대부분 철폐) △호포제 실시(평민에게만 부과하던 세금을 양반도 부과) △경복궁 중건(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 △ 비변사(備邊司) 혁파 및 의정부(議政府) 기능 회복 등이다.

[사진설명]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조선의 정궁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2017 Wikipedia
[사진설명]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조선의 정궁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2017 Wikipedia

흥선대원군은 조선 말기가 여러 상황과 직면해 있었던 만큼 여러 상황 내지 사건 등과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간추리면 △세도정치 근절 △법전 정비 △삼군부 육성 △통상수교 거부 정책 △오페르트 도굴 사건 △제너럴셔먼호 사건 △척화비(斥和碑)를 건립 △종교탄압(천주교, 동학) △인사 실패와 혼란 △독재화 △탄핵과 실각 △고종 축출 쿠데타 기도와 실패 △개혁의 무효화 △민승호 폭사 사건 △정적들과의 갈등과 이재선 추대 음모 △민씨세도 용인과 권력투쟁 △임오군란과 제2차 집권 △청나라 납치와 감금 △고종 폐위 시도 △개화파 암살 시도 △제3차 집권과 이준용 옹립 기도 △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암살 의혹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대체로 백성에게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경복궁 중건의 경우 무리하게 추진하고 세금을 걷는 등 부작용이 많아 원성을 듣기도 했다. 왕의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국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비공식적인 권력 행사’를 한 것이고 이는 과거 세도정치가 한창이던 때에 안동김씨가 이용했던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끝났지만, 흥선대원군도 안동김씨가 썼던 방식을 이어받은 셈이 됐다.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은 폐쇄적인 것, 즉 통상수교거부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이라 부르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이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만들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그들과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라고 썼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파한 전투이자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신미양요의 경우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참패한 전쟁이었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병인년)에 만든 척화비를 1871년(신미년)에 전국적으로 세운 것은 위기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병인양요에서는 승리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나 신미양요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다.

흥선대원군은 또 서양의 침략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활용했다. 또한 중국의 시선, 즉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대외정책은 강경한 배외적 태도를 고수했다. 결국 이 같은 대외정책은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평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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