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는 군대의 기간이다.(중략) 장교는 역경에 처하여서도 올바른 판단과 조치를 할 수 있는 통찰력과 권위를 갖추어야한다.」「장교의 책무」 중에서

6.25전쟁 중 수많은 전투가 있었으나 수도 서울을 사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가 가평전투다. 가평전투에서 영연방군이 승리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교 중 한명이 캐나다군 마이클 레비 중위다.

그는 온갖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벼랑끝 전술을 펼치고 용감한 투혼을 발휘하여 적을 무찔렀다. 하지만 전후 많은 동료 장병들이 가평전투의 승리로 군인 최고의 영예인 군십자무공훈장을 받았으나 그는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필자는 지난 4월 캐나다군 장교단의 요청으로 캐나다군의 가평전투지역인 가평군 북면 노적봉(858M) 일대와 그 옆의 봉우리 677고지를 두 차례 안내한 적이 있다. . 그날 여덟 명의 캐나다 장교단을 통해서 내가 미처 몰랐던 마이클 레비 중위에 대한 비화를 알게되었다.

가평전투는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때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2박 3일간 가평군 북면 504고지와 677고지에 일대에서 2000명의 영연방 27여단과 10,000명의 중공군 118사단 및 60사단이 맞붙은 전투이다.

영연방군이 다섯배나 많은 중공군은 무찌를수 있었던 것은 677고지를 사수하였던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나다 경보병여단 2대대 D중대 10소대장이었던 마이클 레비 중위의 역할이 컸다. 677고지 쪽에는 중공군 5,000명과 캐나다군 500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캐나다 보병대대는 인해전술로 밀고 올라오는 중공군을 향해 사격을 가해 이미 350명을 사살 했지만 적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캐나다군 고지를 향해 공격해왔다.

급기야 중공군이 아군 진지가지 도달하여 구름떼처럼 몰려들자 레비중위는 본인의 목숨뿐 만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까지 담보하고 결단을 내린다. 마침내 통신장교를 통해 작전지휘본부에 677고지 아군진지 위로 포사격을 요청한다.

이 요청은 대대장 스톤 중령에게 전달되고 대대장은 이를 받아들여 즉각 여단작전사령부에 요청하여 뉴질랜드 제 16왕립포병여단이 아군 진지위로 20분간 포사격을 집중한다.

아군 진지 주변에서 마지막 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은 추풍낙엽이되고 레위중위로부터 포사격 사전 예고를 받은 부하들은 갱도진지와 바위틈에 숨어 목숨을 구한다.

이윽고 677고지 5~6부 능선에서 대기 하고 있던 중공군이 또다시 공격해오자 레비 중위는 2차 아군진지내 포사격을 요청하고 성공시킨다.

중공군은 하루밤 사이에 캐나다군 보병대대에 의해 350명 그리고 뉴질랜드군 포사격에 의해 1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하고 북쪽으로 퇴각한다.

가평전투는 이후 세계 전투사에 남을 명전투로 기록되었다. 또 전쟁이 끝나고 가평전투에 임했던 캐나다 대대는 트루먼 미국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캐나다 대대 장병들이 영연방 군인들의 최고 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마이클 레비중위는 제외되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50년이 지난 어느날 박격포 소대장으로 가평전투에 참가하였던 허브그레이 중위는 가평전투에 대한 회고록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조사하게되었다.

그리고 가평전투 당시 통신장교였던 맬 캔필드가 기록한 자료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 대대장이었던 스톤 중령이 포상과 관련하여 레비중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유태인에게는 훈장을 수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스톤중령은 레비의 포사격 요청을 자기에게 중간에서 전달한 윌리 밀스 대위를 십자무공훈장 수상자로 상신한다. 이렇게 되어 레비의 무공은 묻혀버린다. 오랜 세월이 지난후 허브 그레이가 레비중위의 명예회복에 나선다.

그리고 2003년 마침내 그의 무공이 세상에 알려지고 캐나다 총독으로 부터 영광스러운 「그랜트 어브 암스」를 수여받았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명랑대첩에 앞서 언급했듯이 「생측사(生則死) 사측생(死則生) 살고자 하고 싸우면 죽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 라는 진리를 실천한 장교였다. 그는 아군진지에 포사격을 요청하여 자신과 부하직원들의 목숨을 구했다.

장교의 현명한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는 1951년 중위에서 1974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23년간 진급도 두단계 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은 인내하며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2003년 명예가 회복되고 4년후 2007년 영면에 들었다. 진실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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