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성우겸 배우
이종구 성우겸 배우

한글 맞춤법은 우리가 글을 쓰거나 읽는 데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

같은 이치로 표준 발음법은 우리가 말을 하거나 듣는 데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공공성을 지닌 방송사나 학교에서는 반드시 표준 발음으로 방송이나 교육을 하게 되어 있다.

철자법의 표준을 위한 한글 맞춤법은 나라가 없던 1933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발음의 표준을 위한 표준 발음법은 나라를 되찾고도 무려 43년이 지난 1988년에야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는 우리가 표준 철자법에 비해 표준 발음법의 필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표준 발음법에서 가장 문제되는 점은 역설적으로 규정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국민들이 표준 발음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별로 지킬 마음도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빚을’을 [비즐]로 바르게 발음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될까? ‘들녘에서’를 [들ː려게서]로 발음하는 방송인이 적지 않고, ‘닭을’을 [다글]로, ‘무릎을’을 [무르블]로 발음하는 탤런트들도 흔하다.

우리가 표준 발음법을 이처럼 지키지 않는 것 가운데 가장 심한 게 제3장의 ‘음의 길이’다. 제3장은 모음의 장단을 구별하여 발음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 국민은 물론 방송인도 이 규정을 잘 지키지 않는다. 가장 정확한 발음이라는 뉴스 보도 언어도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단음 구별의 정확도는 평균 30% 정도이다.

‘고맙다’는 뜻으로 “감사(感謝)합니다[감ː사함니다]”로 말해야 할 자리에서, ‘당신들을 감독하고 조사하겠다’는 “감사(監査)합니다[감사함니다]”는 말로 흔히 으름장을 놓는 것이 오늘날 방송인들이다.

또 방송을 감독해야 할 방송위원회가 제작한 광고도 장단음 정확도는 겨우 12.5%이다. 이처럼 표준 발음법의 제3장은 현재 거의 죽은 조항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국가는 공청회를 열어서 표준 발음법 제3장의 존속 여부를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다른 문제들도 이참에 함께 손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선릉’과 같이 모호한 발음의 처리 문제, 인명 발음은 표준 발음법에서 예외인가 하는 문제, 억양을 표준 발음의 새 요소로 넣는 문제 등등이다.

또 표준어 모음의 발음편에 토박이말 이외에도 한자어를 넣어서 쓸모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하루 빨리 ‘국정 한국어 표준 발음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재정비를 한 다음에는 국민들이 표준 발음법을 잘 알고 지킬 수 있도록 정부는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현재처럼 규정을 만들어만 놓고 학교에서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방송인이 방송법에 규정된 표준 발음을 하지 않아도 방관만 하는 이런 안일하고 무책임한 자세는 고쳐야 한다.

사실 장단음 구별을 비롯하여 표준 발음법을 국민들이 잘 지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부실한 국어교육이다. 발음은 아는 지식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익히는 기능교육의 대상이다.

그런데 현행 초등학교 ‘말하기·듣기’ 1~6학년 1·2학기 교과서 총 1,467쪽 가운데 발음 관련 내용은 불과 27쪽으로 1.8%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장단음은 딱 1쪽이다.

그나마 다른 쪽에서는 [고ː미]로 표기해야 할 ‘곰이’의 발음을 [고미]로 표기해, 교과서가 오히려 발음을 잘못 가르치기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나라 발음교육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다.

학교가 글자의 맞춤법을 가르치기 위해 초등학생들에게 몇 년 간 받아쓰기 훈련을 시키는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표준 발음법을 만든 교육부가 이처럼 표준 발음 교육을 소홀히 하는데, 그 누가 표준 발음법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표준 발음의 모범을 보여야 할 방송인과 교육자들이 비표준 발음을 하는데, 국민들이 어떻게 표준 발음을 할 수 있을까?

〈김창진/전 초당대 교양과 교수·한말운동본부 사무국장〉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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