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릉, 김포 장릉, 양주 온릉

경기도 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릉 중 파주 장릉과 김포 장릉, 양주 온릉은 모두 1970년 5월 26일 나란히 사적으로 지정됐다. 파주 장릉 능침 정면.  ⓒ 국립문화재연구소
경기도 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릉 중 파주 장릉과 김포 장릉, 양주 온릉은 모두 1970년 5월 26일 나란히 사적으로 지정됐다. 파주 장릉 능침 정면.  ⓒ 국립문화재연구소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면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는데,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이같이 말했다.

선조는 이를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원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이처럼 의연한 태도로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추존왕인 원종의 무덤 ‘김포 장릉’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는 장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릉은 3곳이 있다. 나머지 2곳은 16대 왕인 인조의 ‘파주 장릉’과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영월 장릉’이다.

이중 2곳이 경기도에 있는데, 김포 장릉은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무덤이고, 파주 장릉은 원종과 인원왕후의 아들 인조(1595~1649)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원종의 아들이자 파주 장릉의 주인 16대 왕 인조는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사건으로도 유명한 왕이다. 재위 기간에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등등 조선시대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겪은 왕으로, 시대적인 이유로 불운의 왕이라 평가된다.

이 밖에도 양주에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무덤인 온릉이 있다.

단경왕후는 조선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배다른 아우인 중종을 임금의 자리에 올린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추진파(反正推進派)에 의하여 살해당하였고, 폐위되었다가 영조 때 복위되었다.

파주 장릉과 김포 장릉, 양주 온릉은 모두 1970년 5월 26일 나란히 사적으로 지정됐다.

파주 장릉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파주 장릉 석상 미술.   ⓒ 국립문화재연구소
파주 장릉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파주 장릉 석상 미술.   ⓒ 국립문화재연구소

■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파주 장릉’

파주 장릉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를 합장한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3호로 지정됐다.

인조는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뒀고, 9월 20일 파주 운천리의 인현왕후 능 왼쪽에 예장하였는데 그곳은 인조가 생전에 능지로 지목했던 곳이었다. 1731년(영조 7) 능에 뱀과 전갈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전통적으로 봉분을 감싸는 12면의 병풍석에는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을 조각하였지만, 장릉의 병풍석에는 목단과 연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 상석 2좌가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의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팔각 장명등 1좌가 있는데 장명등에도 목단과 연화 문양을 새겼다. 가장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능을 옮기기 전 옛 능에 설치되었던 인조 때의 석물과 이장 후 새로 설치한 영조 때의 석물이 혼재된 상태이다. 능원 아래쪽에는 정자각·비각·수복방(守僕房)·홍살문·재실이 있다.

김포 장릉은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된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무덤이다. 김포 장릉 정자각 전경.  ⓒ 문화재청
김포 장릉은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된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무덤이다. 김포 장릉 정자각 전경.  ⓒ 문화재청

■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 ‘김포 장릉’

김포 장릉은 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된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202호로 지정되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이는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각 능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상석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그 아랫단에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고, 능원 밑에 정자각·비각·수복방(守僕房)·홍살문·재실이 있다.

무덤 아래에는 1753년(영조 29)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으며, 1622년(인조 즉위) 흥경원(興慶園)이라는 원호(園號)를 받았다.

1627년(인조 5) 현 위치로 옮겨졌고, 1632년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章陵)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다. 1626년 조성된 인헌왕후의 무덤은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가 1627년 원종 옆으로 이장되었다.

양주 온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1487~1557)의 능이다. 양주 온릉 곡장.  ⓒ 문화재청
양주 온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1487~1557)의 능이다. 양주 온릉 곡장.  ⓒ 문화재청

■ 조선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가 잠든 ‘양주 온릉’

양주 온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1487~1557)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신수근의 딸로 1499년(연산군 5) 진성대군(중종)의 부인이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반정 공신들의 의견에 따라 7일만에 폐위되었다.

1557년(명종 12) 71세로 세상을 떠나 친정 거창신씨의 묘역에 묘를 조성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182년 후인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시호를 단경왕후, 능의 이름을 온릉이라 하였다.

온릉은 추존된 왕비의 능제인 정릉(태조비 신덕황후)과 사릉(단종비 정순왕후)의 예에 따라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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