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는 곳

서울 동북쪽의 동구릉(東九陵)과 홍유릉, 서쪽 고개 너머 서오릉(西五陵) 등 수도권 일원에는 조선왕조 오백년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도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 동구릉이다.

여기를 동구릉이라 부른 것은 1849년 헌종의 경릉이 아홉번째로 들어서면서부터이고, 그전에는 능이 늘어나는 대로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렸다

사진 - 구리 동구릉에는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사진 - 구리 동구릉에는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9릉은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 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가 묻힌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元陵),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경릉(景陵), 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綏陵)이다.

■ 조선 1대 태조의 ‘건원릉’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태조의 재위 기간은 1392~1398년이다. 이름은 이성계이며 고려말 홍건적·왜구 등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해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했다.

신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기반을 닦아 공양왕을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했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시대를 열었으나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의 싸움에 실망하여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현릉’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덕왕후 권씨(제세 : 1418년 음력 3월 12일 ~ 1441년 음력 7월 24일)는 본관이 안동인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령부부인 최씨의 딸로 1418년(태종 18)에 홍주(충남 홍성) 합덕현 사저에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에 세자 후궁으로 승휘(承徽)가 되었고, 양원(良媛)을 거쳐, 1437년(세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

사진 - 이곳을 동구릉이라 부른 것은 1849년 헌종의 경릉이 아홉번째로 들어서면서부터이고, 그전에는 능이 늘어나는 대로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렸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사진 - 이곳을 동구릉이라 부른 것은 1849년 헌종의 경릉이 아홉번째로 들어서면서부터이고, 그전에는 능이 늘어나는 대로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렸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목릉’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휘릉’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재세 : 1624년 음력 11월 7일 ~ 1688년 음력 8월 26일)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로 1624년(인조 2)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가 되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살아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 후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사진 -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명성왕후 김씨(재세 : 1642년 음력 5월 17일 ~ 1683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혜릉’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했다.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재세 : 1686년 음력 5월 21일 ~ 1718년 음력 2월 7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숙종 44)에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로 추존됐다.

사진 - 동구릉 역사문화관 전경. [출처-경기도뉴스포털]
사진 - 동구릉 역사문화관 전경. [출처-경기도뉴스포털]

■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원릉’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영조의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재세 : 1745년 음력 11월 10일 ~ 180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04년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수릉’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추존황제 문조(재세 : 180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음력 5월 6일)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순조 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문조는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신정익황후 조씨(재세 : 1808년 음력 12월 6일 ~ 1890년 음력 4월 17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그 후 1866년(고종 3)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에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경릉’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헌종(재세 : 1827년 음력 7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 재위 : 1834년 음력 11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은 추존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1827년(순조 27)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834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1849년(헌종 15)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908년(융희 2)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됐다.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재세 : 1828년 음력 3월 14일 ~ 1843년 8월 25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828년(순조 28)에 안국방(현 서울 안국) 외가사저에서 태어났다.

1837년(헌종 3)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 사이에 후사를 낳지 못하였다. 1843년(헌종 9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융희 2)에 효현성황후로 추존됐다.

■ 동구릉과 함께 갈매도당굿전수관을 만날 수 있는 ‘구리 둘레길 2코스’

사진 - 동구릉은 전체 능역이 59만여 평에 달해 그 광활한 대지와 숲만도 장관이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사진 - 동구릉은 전체 능역이 59만여 평에 달해 그 광활한 대지와 숲만도 장관이다. [출처-경기도뉴스포털]

구리 둘레길 2코스는 동구릉을 둘러싸고 있는 구릉산과 갈매천을 따라 갈매지구를 둘러볼 수 있는 7.8㎞ 길이의 코스로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코스를 따라 걸으면 갈매도당굿전수관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5호인 ‘갈매동도당굿’은 ‘갈매동 산치성 도당굿’으로 500~600여년 전부터 갈매동 일대 7개 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도당굿은 짝수 해의 삼월 초하루부터 삼짇날에, 마을 산신과 도당신에게 제(祭)를 올리고 굿을 하며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무탈함과 복을 기원하는 의례다.

또한 동구릉은 전체 능역이 59만여 평에 달해 그 광활한 대지와 숲만도 장관이다. 숲이 울창해 삼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고, 학생들 소풍 장소로, 역사 공부의 현장으로도 제격이다.

사진 - 구리 둘레길 2코스는 동구릉을 둘러싸고 있는 구릉산과 갈매천을 따라 갈매지구를 둘러볼 수 있는 7.8㎞ 길이의 코스로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출처-구리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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