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52호 구국공신 충열공(忠烈公) 이방실(李方實)장군

이방실 장군 묘
이방실 장군 묘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일상의 평화가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고장 역사탐방 길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 81에 위치한 고려후기 홍건적 토벌 명장으로 알려진 이방실 장군 묘를 찾았다.

이방실 장군(1298~1362)은 고려후기 상장군,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조부는 함안이씨 시조인 이상(李尙)이고, 아버지는 이원(李源)이다.

이방실 장군은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되었고,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전(田) 100결(結)도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대호군이 되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서 민란을 일으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 부자를 쳐서 진압했다.

1359년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 등의 홍건적이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 정주(靜州)·인주(麟州)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이방실 장군 묘비
이방실 장군 묘비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鐵化)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뒤이어 상만호가 되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고선주(古宣州)에서 접전한 끝에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했을 때 풍주(豐州)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이 하사되었다.

1361년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홍건적이 20여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오자, 추밀원부사로서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 지휘사 김경제(金景磾) 등과 함께 개주(价州: 지금의 개천)·연주(延州: 지금의 영변)·박주(薄州: 지금의 삭천) 등지에서 요격했다.

그러나 안주와 절령(岊嶺)에서 참패해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1362년 총병관(摠兵官)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사유·관선생을 죽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金鏞)의 간계에 의해 공민왕의 명을 받은 박춘(朴椿)정지상(鄭之祥) 등에게 살해됐다.

위패를 모시는 충렬사와 신도비 전경
위패를 모시는 충렬사와 신도비 전경

이방실 장군 묘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는 1986년에 만든 이방실장군을 배향한 사당인 충렬사가 있고 그 앞에는 1994년에 만든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계단을 따라 조성된 묘역을 오르다 보면 이방실 장군의 후손인 ‘이집’과 ‘이예’의 묘를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이방실 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방실 장군의 묘는 봉분의 규모는 높이 1.7미터 둘레 13.2미터이며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또한 봉분을 중심으로 왼쪽에 묘비가 세워져 있는 배면에서 바라보면 장군의 묘가 산 아래를 굽어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묘비의 내용을 통해 충렬공 이방실 장군의 묘라는 사실과 함께 부인인 진양 강씨와 영산 신씨가 함께 합장된 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실장군 묘 상석과 향로석
이방실장군 묘 상석과 향로석

현재 이방실 장군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군의 묘를 통해 고려 후기 홍건적의 침입과 혼란스러웠던 정국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이방실장군의 묘는 격식을 갖추어 조성되지 못하다가 공양왕 때 명예를 회복하여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고 1452년에 고려의 공신으로 배향됐다.

한편,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포5길 82에는 구국공신 충열공(忠烈公) 이방실(李方實)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남강서원(함안)이 있다.

이방실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1842년(헌종 8) 후손들이 남강사(南岡祠)를 건립하여 매년 제를 지냈으나, 고종 때 훼철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후손들이 1944년 옛 터에 복원해 1998년 정부보조금으로 충렬사와 남강서원을 중건하여 현재까지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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