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백성구제에 평생을 바친 문신 … 민생정치의 모범을 찾다~

가평문화원·실학박물관 공동주관으로 오는 9월 잠곡서원 복원 위해 제례식과 심포지엄 개최

▲ 잠곡 김육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구)청평역사부지 내 잠곡서원 터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불 땐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더니 시간이 가고 결국 완연한 봄이 우리 곁을 찾았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아마도 지금은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19 역시 결국엔 종식되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평화를 찾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일상의 평화가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우리고장 역사탐방 길은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140-17에 위치한 조선 최고의 경세가 잠곡(潛谷) 김육(金堉)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잠곡서원지를 찾았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은 조선시대 최대의 개혁인 대동법(大同法)을 추진한 학자이자 관료로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가평군 청덕동(현 청평면)에 은거해 10여 년 동안 직접 농사를 지으며 야인 생활을 했다.

이처럼 가평지역은 조선의 개혁을 꿈꾸며 실학적 경륜을 쌓아온 잠곡 선생의 개혁정신의 산실이다. 잠곡 선생은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나가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고 수레, 수차 및 동전의 도입과 활자의 제작에도 진력했다.

▲ 잠곡 김육 선생 제단위비(祭壇位碑)

김육 선생은 조선조 사림파의 거두 김식의 현손으로, 인조와 효종 양 대에 예조판서와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제수된 조선조 최고의 관료 중 한 사람으로 궁핍한 백성구제에 평생을 바친 문신이자 실학자이다.

잘 아시다시피 당시 조선의 조세는 전세와 요역, 공물로 나뉘어 부과되었는데 그 중 각 호마다 특산물로 바치는 공물의 부담이 가장 컸다.

수백 가지 현물로 세금을 내다보니 품질이 일정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자의적 수탈이 가능해 대신 세금을 내주고 이자를 붙여 받는 방납의 폐단이 생기는 등 백성들이 무척이나 고초를 겪었다.

대동법은 이런 폐단을 줄이기 위해 가구당 동일하게 부과하던 공물 대신 쌀로 징수하되, 토지면적에 따라 차등 부과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은 크게 덜어주면서도 국가의 재정수입은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바로 이 대동법 실시의 가장 중심에 있었던 이가 잠곡 김육 선생이다.

▲ 잠곡 김선생 신위(潛谷金先生神位)라고 쓰여진 추모비

잠곡(潛谷) 김육(金堉)선생의 일생은 매우 극적이었다. 한양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기에 아버지를 잃고 임진왜란 직후에는 모친상마저 당해 고모부 내외에 의지하며 컸다.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지만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정여창 등 5인의 문묘 향사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후 이항복 등의 건의로 자격박탈은 철회되었으나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그는 결국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 청덕동(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140-17)으로 거처를 옮겨 농사를 지으며 칩거에 들어간다.

10년간의 칩거생활 동안 김육 선생은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먹고 살기 위해 남의 밭을 매주기도 했고 직접 숯을 구워 한양까지 나가 팔아서 생계를 꾸렸다. 이 시기에 백성들의 구체적 생활을 깊이 체험했던 것이 당파를 초월한 위민정치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조반정 후 잠곡 김육 선생은 당시 44세의 나이로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되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김육 선생이 활동하던 17세기는 조선의 정치경제사적 측면에서 커다란 전환기이자 과도기였다. 임진왜란의 후유증도 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자호란까지 겪으면서 국가기능은 마비되고 국토는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으니 일반 백성들의 살림은 극도로 어려움에 처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집권세력은 주자학적 명분론만 내세우며 숭명이니, 반청이니 하는 정치적 구호만 일삼았다. 오로지 김육 선생만이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 대동법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것이다.

대동법은 김육 이전에도 수차례 논의되었고 또 일부에서는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 재정수입을 주로 담당했던 호서지방과 호남지방에서의 대동법 실시가 성공의 관건이었는데 이 지역의 시행여부를 놓고는 여전히 논란만 무성했다.

대동법은 가구 단위로 균등하게 부과하던 공납 대신 토지 단위로 세금을 부과하다 보니 땅을 많이 소유한 양반이나 부호들의 반발이 컸다. 또 방납 등으로 부당이익을 취해오던 서리와 그들과 이익을 공유했던 관료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고 우의정에 임명된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말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조정 내에서는 대동법 실시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다수였지만 그는 효종 2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결국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1654년 6월 효종 5년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호남지방까지 대동법을 확대하려 했으나 시행을 앞둔 효종 9년 9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김육 선생은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도 전라도 대동법안을 유언으로 상소할 만큼 강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다. 결국 그가 사망한 후 숙종 34년에 황해도까지 대동법이 실시되어 전국적인 세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 잠곡 김육 선생 추모비 건립 기금 찬조자 방명기 기념비

1705년 숙종 31년 이 지역 선비들은 김육 선생의 학덕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기거했던 이 마을에 잠곡서원을 세웠다.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壇)을 설치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되었으며, 1981년에 다시 설단하고 위패석을 세웠다. 그러나 발굴과정에서 서원 터가 아닌 것으로 판정되어 2013년 4월 12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현재 잠곡서원 터 정면 중앙에는 ‘잠곡 김선생 신위(潛谷金先生神位)’라고 새긴 제단위비(祭壇位碑)가 서 있고, 우측으로 1981년에 세운 “잠곡선생김육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잠곡 선생 김육추모비건립기금찬조자방명기」를 기념비로 세웠다.

김육 선생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양근(楊根)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홀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편 가평문화원(원장 김만종)과 실학박물관은 오는 9월경 공동주관으로 잠곡 김육 선생 탄생 440주년을 맞이해 경기도문화제 지정이 해제된 잠곡서원을 복원하고자 오전에는 제례식과 오후에는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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